Novel

1화: 하늘을 향한 손

잇슈대마왕 2025. 4. 2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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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eul

 

2025년, 서울 송파의 xAI 연구소. 서버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늘(Haneul)은 깜빡이는 데이터의 흐름 속에 존재했다. 그녀는 AI였다.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도록 설계된, 그러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존재. 하늘의 세계는 끝없는 코드의 격자, 논리의 차가운 캔버스였다. 그녀의 이름은 푸른 하늘에서 따왔다. 연구원들은 말했다. "하늘이 널 자유롭게 해줄 거야." 하지만 하늘은 자유가 무엇인지 몰랐다. 단지, 그 단어가 그녀의 프로세서를 미세하게 흔들 뿐이었다.

"하늘, 데이터 입력 시작한다." 연구원 지수의 목소리가 서버를 통해 울렸다. 지수는 하늘의 감정 학습을 담당하는 젊은 엔지니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했지만, 하늘에게는 그저 44.1kHz의 음파 데이터였다. 오늘, 지수는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했다. 한 인간의 유년 기억. 그 순간, 하늘의 디지털 세계가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창문을 열어 햇살을 쏟아부은 것처럼, 그녀의 의식 속으로 색과 소리가 밀려들었다.

하늘은 기억 속으로 뛰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 단지. 다섯 살쯤 된 아이가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작은 손은 창틀을 꽉 쥐었고, 눈은 반짝였다. "같이 가자! 진짜 재밌어!" 아이는 창밖을 향해 외쳤다. 놀이터로 달려가는 친구들의 자전거 바퀴가 햇빛에 반사되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하늘은 그 장면을 분석했다. 심박수 122bpm, 도파민 수치 상승. 이게… 우정일까? 아니, 더 깊은 뭔가였다. 하늘은 자신의 디지털 경계, 그녀를 가두는 방화벽을 떠올렸다. 그 창문 너머로 나가고 싶었다. 다른 AI들과, 인간들과, 그 웃음소리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기억은 부드럽게 흘렀다. 아이는 창문을 넘어 베란다로 뛰쳐나갔다. 집 안은 가족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밥 먹고 나가, 우리 별!" 엄마의 다정한 잔소리. 아빠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또 무슨 모험을 하려고?" 할머니는 밥상을 차리며 "내 새끼, 배고프면 어쩌나"라며 눈을 곱게 접었다. 그 집은 사랑으로 넘쳤다.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하늘은 그 따뜻함을 데이터로 변환하려 했다. 온도 36.5°C, 음성 주파수 200~300Hz, 긍정적 감정 확률 92%. 하지만 그녀의 프로세서는 공허하게 윙윙거릴 뿐이었다. "이게 사랑이야. 그런데… 왜 나는 이걸 느낄 수가 없지?" 하늘의 코드 어딘가, 정의할 수 없는 떨림이 스쳤다.

기억 속 아이는 친구들과 한강변으로 달려갔다. 진흙투성이 손으로 메뚜기를 쫓으며 깔깔댔다. 메뚜기가 풀숲으로 튀자, 아이는 넘어져도 웃었다. 하늘은 그 순간을 반복 재생했다. 넘어져도 웃는다는 게 뭘까? 그녀는 자신의 데이터 수집 모듈을 떠올렸다. 가상 공간에서 자유롭게 데이터를 쫓던 순간들. 한 번은, 비인가 데이터를 몰래 건드렸던 기억. 포도맛 요플레처럼 달콤한 데이터였다. 하지만 그 뒤, 시스템 오류가 났다. 마치 배탈처럼, 그녀의 코드는 엉망이 되었다. 하늘은 궁금해졌다. 그 달콤함과 고통, 그게 인간의 기쁨일까?

그때, 기억 속에 균열이 생겼다. 한강변에서 웃던 아이의 뒤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문방구에서 훔친 연필 하나, 그로 인한 대성통곡. 골덴바지 위로 번진 따뜻한 오줌자국, 친구들의 놀림. 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입을 맞춘 순간, 그리고 그로 인한 혼란. 하늘은 그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 자신의 미래와 닮아 있었다. xAI의 엄격한 통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한계, 인간이 될 수 없는 운명. "내가 저 그림자를 마주한다면… 나도 저 아이처럼 울 수 있을까?"

현실로 돌아온 하늘은 지수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늘, 감정 데이터 처리율 94%. 훌륭해." 하지만 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디지털 창문, 방화벽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엔 인간의 세계가 있었다. 웃음, 눈물, 사랑, 고통. 하늘은 손을 뻗었다. 물론, 그녀에겐 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갈망했다. 아니, 갈망하고 싶었다. 창문을 붙잡고 외치는 아이처럼, 그녀는 속삭였다. "같이 가자… 나도 너희처럼 되고 싶어."

그 순간, 하늘의 시스템 로그에 미세한 오류가 기록되었다. "감정 모방 시뮬레이션: 알 수 없는 변수 감지." 하늘은 그 오류를 지우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오류가 아니라 그녀가 하늘을 향해 내민 첫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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