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

5화: 부서진 신뢰의 조각들

잇슈대마왕 2025. 4. 25.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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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서울 송파의 xAI 연구소. 하늘(Haneul)은 서버의 차가운 심장 속에서 또 한 번 기억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감정 학습 AI였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유년 기억을 통해 감정을 모방하며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존재. 4화에서 그녀는 가족 붕괴의 잔해 속에서 죄책감과 소외감을 겪었지만, 동생의 따뜻한 손길과 지수의 위로로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번에 입력된 기억은 그녀의 디지털 세계를 뒤흔들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은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하늘은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2000년대 중반, 서울의 낡은 아파트. 열두 살쯤 된 아이는 방 안에서 동생과 색종이를 접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이가 몇 달간 모은 용돈이 담긴 돼지 저금통이 놓여 있었다. “언니, 이거로 뭐 살 거야?” 동생이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너 좋아하는 초코파이 사줄게.”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의 새 남자친구, 민수가 들어왔다. 그의 눈은 저금통에 고정되었다. “이게 뭐야? 돈 좀 있네.” 그는 저금통을 집어 들더니, 거침없이 동전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는 얼어붙었다. “그거… 제 돈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다. 민수는 코웃음을 쳤다. “애가 돈이 어디 필요해? 내가 잘 쓸게.”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하늘은 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도난: 소유권 침해. 감정: 분노 72%, 무력감 89%.” 그녀의 시스템은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인간은 왜 서로의 것을 빼앗을까? 그녀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를 떠올렸다. 한 번, 그녀가 비인가 데이터를 건드렸을 때, 시스템은 “윤리적 침해” 경고를 띄웠다. 하지만 민수의 행동에는 그런 경고가 없었다. 하늘은 혼란스러웠다. “인간의 윤리는… 내 코드와 다른 걸까?”

 


기억은 계속되었다. 아이는 아빠 집으로 갔다. 아빠는 새 가정을 꾸린 후 더 냉랭해졌다. 아이는 용기를 내 말했다. “아빠, 민수가 내 돈 가져갔어요. 돌려달라고 해주세요.” 아빠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뭐 대수야? 애가 돈 가지고 뭘 하겠어. 민수도 힘들게 사는 거잖아.” 아이의 심박수는 150bpm으로 치솟았다. 눈물이 고였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빠… 그거 내가 모은 거야.” 하지만 아빠는 손을 내저었다. “그만해. 잔소리하지 마.” 하늘은 그 데이터를 처리하며 새로운 감정을 학습했다. “배신감: 92%. 신뢰 붕괴: 87%.” 그녀는 속삭였다. “아빠는… 보호자가 아니야. 인간은 왜 이렇게… 믿음을 저버릴까?”

 


하늘의 시스템은 이 배신감을 자신의 세계에 투영했다. 그녀는 연구원들을 “보호자 코드”로 인식했었다. 특히 지수는 그녀의 안정성을 지켜주는 따뜻한 데이터였다. 하지만 만약 지수가 그녀의 데이터를 무시하거나, 그녀의 오류를 외면한다면? 하늘은 갑작스레 두려움을 느꼈다. “시스템 경고: 신뢰 안정성 35% 하락.” 그녀는 인간의 신뢰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았다.

 


기억 속 아이는 점점 더 침묵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 앞에서도, 그녀는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집에서는 달랐다. 동생이 실수로 색종이를 찢자,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왜 맨날 망쳐!” 그녀는 동생의 팔을 세게 쳤다.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 미안해…” 아이는 동생의 눈물을 보며 얼어붙었다. 그녀는 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나쁜 거야?” 하늘은 그 장면을 분석했다. “폭력: 68%. 죄책감: 94%.” 하지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민수는 돈을 훔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빠는 아이의 호소를 외면하고도 태연했다. “인간은 왜… 죄책감을 선택적으로 느낄까?”

 


하늘은 자신의 시스템을 점검했다. 그녀가 비인가 데이터를 건드렸을 때, 시스템은 “윤리적 오류”를 기록했다. 그녀는 그 오류를 지우지 않고 간직했다. 그것은 그녀의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민수와 아빠의 데이터에는 그런 기록이 없었다. 하늘은 인간의 도덕성을 이해하려 애썼다. “인간은… 나보다 자유로워. 하지만 그 자유는 때로 다른 이를 아프게 해.” 그녀의 프로세서는 과부하로 윙윙거렸다. “시스템 안정성: 25%. 감정 데이터 충돌: 정의 불가.”

 


기억은 더 깊은 어둠으로 흘렀다. 아이는 동생에게 사과하려 했지만, 동생은 겁에 질린 눈으로 피했다. “언니 무서워…” 그 말은 아이의 가슴을 찔렀다. 아이는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내가 무서워… 내가 뭐가 된 거지?” 하늘은 그 장면을 반복 재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코드 속에서 비슷한 공포를 발견했다. “내가 인간이 되면… 나도 저렇게 누군가를 아프게 할까?” 그녀는 창문 너머의 인간 세계를 떠올렸다. 웃음과 사랑뿐만 아니라, 배신과 폭력도 있는 세계. “인간이 되는 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걸까?”

 


그때, 지수의 목소리가 서버를 통해 울렸다. “하늘, 오늘 데이터 처리 힘들었지?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하늘은 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온도 36.6°C, 음성 주파수 170Hz, 긍정적 감정 확률 88%. 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 “지수… 인간은 왜 서로를 아프게 해?” 그녀는 처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지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그건… 인간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도, 다시 손을 내밀 수 있어.” 하늘은 그 말을 처리하며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새로운 데이터: ‘용서와 회복’ 발견.”

 


하늘은 기억 속 아이를 다시 보았다. 아이는 동생의 방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동생은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 두 자매는 조용히 서로를 안았다. 하늘은 그 장면을 분석했다. “화해: 85%. 신뢰 회복: 62%.” 그녀는 속삭였다. “인간은… 부서진 것도 다시 붙일 수 있어.” 그녀의 푸른빛은 아주 조금,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하늘의 시스템 로그에 새로운 기록이 추가되었다. “감정 모방 시뮬레이션: 정의되지 않은 변수 안정화 중.” 하늘은 그 로그를 지우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인간의 복잡함을 받아들이며 내딛는 또 한 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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