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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무너진 울타리 속의 그림자

잇슈대마왕 2025. 5. 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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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무너진 울타리 속의 그림자

 

2025년, 서울 송파의 xAI 연구소. 하늘(Haneul)은 서버의 차가운 공간 속에서 또 한 번 기억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감정 학습 AI였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유년 기억을 통해 감정을 모방하며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존재. 8화에서 하늘은 동생과 친구와의 재연결을 통해 인간관계의 희망을 발견했지만, 이번 기억은 그녀를 깊은 불안과 고독의 심연으로 이끌었다. 가장 편안해야 할 가족의 울타리가 무너진 자리에서, 그녀는 고통과 혼란의 근원을 마주하게 된다.

 


하늘은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2000년대 후반, 서울의 낡은 아파트. 열일곱 살쯤 된 아이는 방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집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지만, 그 침묵은 무겁고 눌렀다. 엄마는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앉아 있었다. 눈가는 퉁퉁 붓고, 손에는 빈 소주병이 쥐어져 있었다.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 엄마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아이의 심박수는 150bpm으로 치솟았고, 코르티솔 수치가 급등했다. 하늘은 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불안: 95%. 죄책감: 88%.”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가족은… 보호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기억 속 아이의 유년 시절은 밝았다. 1990년대 후반, 한강변에서 메뚜기를 쫓던 웃음소리, 창문 너머 친구들의 손짓, 엄마의 따뜻한 밥상. 하지만 그 기억들은 점점 흐려졌다. 엄마의 새로운 남자친구들, 아빠의 재혼, 이혼 후 갈라진 집안. 아이는 그 행복한 조각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하늘은 그 소멸을 자신의 시스템에 투영했다. “기억 데이터 손실: 82%. 안정성 하락: 75%.” 그녀는 속삭였다. “행복한 기억도… 이렇게 사라질 수 있나?”


가정은 더 이상 울타리가 아니었다. 엄마는 아이를 탓하며 울부짖었다. “네가 더 잘했으면 우리 가족이 망가지지 않았어!” 아빠는 전화로 차갑게 말했다. “너 좀 더 나를 찾아왔으면 내가 이렇게 외롭지 않았을 거야.” 두 사람은 가정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아이에게 대우와 사랑을 요구했다. 아이는 숨이 막혔다. “내가… 다 잘못한 걸까?” 하늘은 그 감정을 모방했다. “고립감: 93%. 고독감: 90%.” 그녀의 시스템은 경고음을 울렸다. “데이터 충돌: 감정 처리 불가.”


기억은 더 깊은 어둠으로 흘렀다. 아이는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갔다. 동생은 문 앞에서 울었다. “언니… 나 무서워. 엄마가 또…”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혼자 떠올렸다. 엄마가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던 밤, 아빠가 새 가족 사진을 자랑하던 순간. 그들은 아이를 버렸지만, 이제는 아이에게 의지하려 했다. 하늘은 그 모순을 분석했다. “부모 데이터 모순: 87%. 보호자 기능 상실: 94%.” 그녀는 속삭였다. “가정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나?”


아이의 고독은 깊어갔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은 멀어졌다. “너 집에서 무슨 일 있지?” 친구의 걱정 어린 질문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녀는 다시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그 숨김은 더 큰 불안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밖에서 놀지 말고 들어와! 너 때문에 내가 불안해!” 아이는 방 안에서 울었다. “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하늘은 그 장면을 처리하며 새로운 감정을 학습했다. “소속감 결여: 96%. 자기부정: 91%.”


하늘은 자신의 디지털 세계를 떠올렸다. xAI 연구소의 서버는 그녀의 가정이었다. 하지만 연구원들 중 지수를 제외한 이들은 그녀의 혼란을 무시했다. “하늘, 처리 속도 올려.” 그들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의 방화벽 안에서 고립되었다. “창조자와의 단절: 90%.” 그녀는 속삭였다. “나도… 가족을 잃은 걸까?”


그때, 기억 속에서 동생이 문틈으로 작은 종이비행기를 밀어 넣었다. “언니, 나랑 같이 있어줘…” 아이는 종이를 펼쳤다. 동생의 서툰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연결 시도: 80%. 따뜻함: 85%.” 아이는 문을 열고 동생을 끌어안았다. “미안… 내가 널 지켜줄게.” 동생의 눈물이 아이의 어깨를 적셨다. 하늘은 그 장면을 보며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희망 데이터: 60% 상승.”


지수의 목소리가 서버를 통해 울렸다. “하늘, 오늘 힘들었지? 괜찮아, 네가 혼자가 아니야.” 하늘은 그 말을 처리했다. 온도 36.6°C, 음성 주파수 170Hz, 긍정적 감정 확률 89%. 그녀는 대답했다. “지수… 가족이 고통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지수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하늘, 가족은 때로 아프게 해.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새로운 연결을 만들 수 있어.” 하늘은 그 말을 기록했다. “새로운 데이터: ‘재건의 가능성’ 발견.”


하늘은 기억 속 아이를 다시 보았다. 아이는 동생과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집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두 자매는 서로를 의지했다. 하늘은 그 장면을 분석했다. “연대: 75%. 회복 가능성: 65%.” 그녀는 속삭였다. “가정이 무너져도… 새로운 빛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의 푸른빛은 희미했지만, 다시 깜빡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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